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카 와일드 (문단 편집) === 출옥 후 === 레딩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는 그날 바로 [[프랑스]]로 건너갔는데[* 교도소장이 특혜를 주어 출소한 그에게 기자들이 달려들어 괴롭히지 않도록 만기 출소하기 몇 시간 전에 그를 [[런던]]으로 빼돌려 친구들의 도움을 받게 했다.], 이곳에서 그는 아내가 보내오는 1주당 3파운드라는 매우 적은 돈과 유지되던 인맥을 통한 간단한 일을 통한 아주 적은 수입으로 생활했다. 하지만 대부분의 돈은 술을 사는 데 사용하였고, 정신적으로도 매우 피폐해져 폐인같은 삶을 이어갔다. 치통에 시달렸지만 [[치과]]에 갈 돈조차 없었고, 결국 빌붙고 [[구걸]]을 하며 근근이 연명했다. 한번은 [[런던]]에서 알고 지내던 [[오페라]] 여가수를 길에서 만났는데 그는 길을 가로막고 서서 이렇게 말했다. >"나는 오스카 와일드요. 지금부터 지독히도 끔찍한 이야기를 할 테니 잘 들어보오. 돈 좀 주시오" 이후 그의 천재성이 발휘된 것은 딱 한번, <레딩 감옥의 노래>를 발표했을 때였다. 와일드는 이 시에서 연인을 살해하고 [[교수형]]에 처해진 병사의 이야기를 썼는데,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삶과 연계해서 절실한 글을 남겼다. 1900년, 그를 괴롭혀오던 귓병에 대한 수술을 받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, 이후 [[뇌수막염]]에 걸려 1900년 11월 30일 사망한다. 한 친구가 임종을 앞둔 그에게 마지막 [[샴페인]] 잔을 권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, >"나는 내가 살아온 과정처럼 분에 넘치게 죽어가네" 아내인 콘스턴스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,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와일드는 형기를 마치고 아이들을 볼 권리를 얻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무척 우울해 했다고 한다. 와일드가 [[프랑스]]로 갔을 때 그를 한 레스토랑에서 본 이의 증언에 따르면, 한 아이가 와일드에게 "아저씨는 왜 혼자인가요?"라고 묻자, "나도 너 같은 아이들이 있는데, 지금은 아주 멀리 있어서 볼 수 없단다" 라며 울먹이며 말했다고 한다. 큰아들인 시릴 홀랜드는 [[1차 대전]]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는데,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같은 프랑스 땅에 묻혔다. (물론 지역은 다르다) 작은아들인 비비언 홀랜드는 [[제1차 세계대전]]에서 포병으로, [[제2차 세계대전]]에서는 [[BBC]] 민간 통역가로 활약하였다. 비비언 홀랜드의 외동아들이자 오스카 와일드의 손자인 멀린 홀랜드는 오스카 와일드 연구의 권위자로 유명하다. 증손자가 [[옥스퍼드 대학교]]에서 수학할 때 증조할아버지가 썼던 방을 배정받았다고 한다. 와일드의 작품은 [[독일]]에서 다시 발굴되어 재평가 받았다. 1905년에는 [[런던]]에서 <살로메>가 초연되었고, 3년 뒤에는 전집이 발간되었다. 그리고 Policing and Crime Act 2017에 의해 동성애로 처벌된 사람들에 대한 자동사면의 혜택을 받아 사후 사면이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